불구하고 그 명성이 널리 떨쳐지지 않은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선생의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였다. 우담정시한 선생은 조선 성리학의 문제들이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논의와 쟁점들로 전개되었던 한편, 양란 이후 당쟁과 사회문제들로 혼란했던 격변기인 17세기 말에 활동했던 유학자이다.
Ⅰ. 주자학(성리학)의 전파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Ⅰ. 서론
1. 주제 선정 이유 및 연구 목적
<고전산문연구> 수업과 관련하여 고전산문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안대회의 『고전산문산책』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허균(許筠), 이옥(李鈺), 김려(金鑢) 등 많은 산문작가들 중에 정약용(丁若鏞)이 속해있었는데, 정약용은 흔히 ‘사상가’나 ‘한
밑줄 친 부분이 성현이 알리고자 한 최세원의 본 모습인 것이다. 첫 번째 일화에서 최세원이 책과 사적을 많이 읽고 담론을 잘 하였다고 하지만 정작 그의 다른 일화는 논리 정연하고 심오한 지식을 원하는 담론이 아닌 그의 재치와 유머를 바탕으로 한 익살맞은 이야기들이다. 네 번째 일화에서
Ⅰ. 서론
퇴계는 한때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사학의 유생과 교육자들에게 나라가 학교를 만들어 교육하는 목적에 대하여 지도한 일이 있었다. 퇴폐한 공교육으로서의 개혁의 가망이 없어지자 인간성회복과 윤리 도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서당 교육을 펴 나갔다. 청나라 때 중국이 신주국보(神州國寶)
율곡 사계의 학통을 이어받아 율곡의 성리학을 주자학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만든 사람은 우암 송시열이다. 우암은 퇴계와 우복의 학설을 공격하고 율곡의 설이 옳음을 논증하는데 평생을 바쳐 노력했는데 이는 당시에 예송문제로 격화된 당쟁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우암이 48세때 유직柳稷등이 율
16세기의 사상적 흐름은 이언적·이황 중심의 理 중시 철학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서경덕을 중심으로 한 氣 중시 철학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기대승에 의해 理와 氣를 조화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이를 계승해 본격적으로 양자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 철학자가 바로 栗谷 李珥(1536~1584)
성리학의 근본은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성리를 천리와 천성, 즉 천명이 인간에 내재한 성(本然性)으로 이해하여 인간의 主體性을 형이상학화하여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것이 공자, 자사, 맹자를 이어받은 송대의 정주학 즉 성리학이라 한다면 이것의 특징은 모두 천인 관계를 위주로 하여 객관
정시한원지재
羽士:도사를 우인(羽人), 우류(羽流)등으로 칭
端方 [du?nf?ng] ① 단정하다 ② 얌전하고 바르다 ③ 올바르다
翰院 : 예문관;翰林院, 爲古代儲備人才的所在。
각설하고 양사원은 바로 문밖에서 서 있다가 정서쪽에서 한 도사가 옴을 보고 면전에 서서 그가 말했다. “무량부처님, 좋습
정시한(丁時翰)>ꡑ -에 보면 스님들이 거주한 것을 알 수 있다. 석불사의 석굴은 인공 굴로 딱딱한 화강암 지대인 우리 나라에서는 고육직책이자 찬란한 성취이다. 석불사의 완성시기 기록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널리 인정받는 것이 경덕왕 10년(751)에 착공해 20-30여 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석불